학생이 유치원 → 초등학교 → 중고등학교 → 대학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타트업 또한 보통 액셀러레이터 → 시드 투자 → 시리즈 A 투자 → B → C와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오큐파이(오니온파이브)는 시드 투자를 받고 액셀러레이터에 간, 다시 말해 초등학교에 갔다가 유치원에 입학한(?) 조금은 특이한 과정을 거쳤는데 그 과정을 더욱이나 네덜란드에서 보냈습니다. 그 독특하고 엄청난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 을 오큐파이가 일냈습니다.
흔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오큐파이의 유럽 액셀러레이터 도전기 1탄을 시작합니다.
SBC와의 첫 만남
2018년 여름, 창업한 지 2년 차에 접어든 오큐파이는 제품이 어느 정도 모습을 잡아감에 따라 앞으로 투자를 어떻게 더 받아야 할지 사업화 전략은 무엇인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던 중, 여의도에서 치뤄진 KEYPLATFORM 컨퍼런스에서 유럽 액설러레이터 STARTUPBOOTCAMP(스타트업 부트 캠프, 이하 SBC) Liz 매니저님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오큐파이 팀에 대해서 알아야 할 점은 창업 멤버 모두 서강대학교 MOT 대학원 출신입니다. 덕분에 머니투데이에서 주최하는 KEYPLATFORM 과 같은 기술 관련 콘퍼런스에 참여하거나 교수님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와이콤비네이터, 테크스타 그리고 국내 프라이머, 스파크랩 등과 액셀러레이터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이 소개해준 SBC 매니저를 만났을 때 조금 당황했습니다. 다행히도 매니저님이 친절하게 SBC를 소개해줬고 핀테크 및 AI 전문가이다 보니 상담 업무 자동화를 목표로 하는 오큐파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스타트업 부트캠프 소개
스타트업부트캠프는 2014년 암스테르담, 베를린, 마드리드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있는 유럽의 가장 큰 액셀러레이터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운영하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이 산업 및 기술 분야 중심으로 기수가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6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프로그램을 이수했고 그중 78%가 평균 7.7억 원 투자를 받았습니다. 스타트업부트캠프 알아보기 →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 짧은 만남이 4개월에 걸친 기나긴 인연으로 이어질지…
갑작스러운 피칭 데이(Pitching day)
2018년 여름 서강대학교 MOT 대학원의 유럽 벤처 생태계 투어 프로그램에 대학원 가족기업(대학원 출신 창업 기업) 자격으로 초청되었습니다. 사업과 박사 과정을 동시에 하고 있던 조가혜(오니온파이브 코파운더, COO)님과 제가 오니온파이브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유럽 일정에서의 첫날, 한국에서 인사를 나눴던 SBC Liz 매니저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 전문가로 초청되어 강의한 Liz 님과 수업 후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제안.
“이틀 뒤 피칭 데이가 있는데 한 번 참가해볼래?”
갑작스러운 제안, 사업 돌파구가 필요했던 회사 상황, 그리고 저의 대답을 지켜보고 있는 교수님들의 매서운 눈초리. 얼떨결에 나온 대답.
“네.”
소풍 가는 마음으로 참가했던 투어가 순식간에 지옥 같은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발표는 이틀 뒤 암스테르담에서 해야 하는데 대학원 일정에 따라 네덜란드 최남단으로 이동해야 했고, 그 어떤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단은 프로그램 일정에 따르다가 발표 당일 암스테르담행 기차를 타기로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버스 이동 → 수업 → 버스 이동 → 수업 → 버스 이동 → 수업 →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하는 강행군 일정 속에서 노트북을 켜고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럽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이번 포스트는 그래서 조가혜님의 기억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유럽에 도착한 날부터 발표까지 유럽의 유명 연구소, 스타트업, 캠퍼스 등 다양한 기관을 돌아다녔지만, 사진이 정말 한 장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도한 발표날. 기차를 타고 발표 장소인 B. Amsterdam으로 조가혜님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지옥행 열차를 타다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는 기차는 저에게는 정말 지옥행 기차였습니다.
“그냥 도망칠까? 발표했다고 거짓말할까?”
가혜님만 어찌어찌 처리하면 아무도 모를 텐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저는 오큐파이 팀에서 발표를 담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발표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지만,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과 감정을 힘겹게 이겨내며 드디어 B. Amsterdam(우리나라의 창조경제혁신센터, 디캠프 등 스타트업 또는 혁신기업이 모여있는 캠퍼스로 SBC 암스테르담 사무실이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조가혜님과 서로 발표하라고 싸우면서 갔습니다.
왼쪽부터 B.Amsterdam 입구, 식당, 옥상, 사진
발표 장소에 도착하고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후에야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알아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SBC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각 도시별로 액셀러레이팅하는 분야 및 산업이 있습니다. 제가 발표를 하게 된 암스테르담 팀은 핀테크, AI, 보안 관련 스타트업을 전문적으로 액셀러레이팅 하는 도시였습니다.
SBC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선발 과정
지원서(사업계획서) 제출 → 1차 선정 → 피칭 데이 → 2차 선정 → 2박 3일 심사 → 최종 선정
오큐파이팀은 지원서 제출을 안 했지만 Liz 매니저님의 특별 추천으로 피칭데이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SBC가 글로벌 액셀러레이터이다 보니 전 세계에서 3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지원을 했고 피칭데이 발표는 암스테르담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위치한 SBC 사무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선정된 30개 스타트업은 최종 과정인 2박 3일 심사 때 프로그램 주최 도시인 암스테르담으로 모여 최종 선정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발표는 작은 무대에서 이뤄졌고 오큐파이팀 외 대여섯 스타트업이 있었습니다. 관중석에는 대략 20명 정도가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스타트업과 협업을 희망하는 유럽 및 네덜란드 대기업, 투자자, SBC 관계자였습니다.
몇 번째 발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기다리라는 동안 장이 꼬이고 폴리고를 수십차례 반복 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발표하는 스타트업의 내용은 하나도 안 들렸고, 머릿속은 하얬습니다.
웅성웅성 대는 소리 속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큐파이 SBC 피칭 데이 발표 시작
“지우 킴, 오니온파이브.”
회사 이름을 듣고 벌떡 일어나 무대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스타트업이 발표할 때는 질문이 별로 없었는데 저희는 질문이 너무 많아 진행자가 시간 관계상 끊어야 했습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질문의 방법과 그 내용이 국내 창업경진대회나 데모데이와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질문의 방법
국내에서는 정해진 심사위원이 끝나고 질문을 하는데 SBC에서는 관중석에 있는 누구나가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자가 손을 들면 마이크를 주고 간단한 본인 소개(이름, 회사, 분야) 후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의 내용
- 다양한 질문 : 변호사, 은행원, 개발자, 마케터, 컨설팅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각자의 관점에서 질문했습니다. 변호사는 유럽에서 서비스를 하게 되는 경우 GDPR과 보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개발자는 현재 데이터 수집과 가공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 어렵지만 재미있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 팀에 대한 높은 관심 : 코파운더 또는 팀의 경력이 아닌 합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서로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어떤 질문자는 싸운 후 어떻게 화해를 하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간 피를 말렸던 발표가 끝나고 가해 님과 15분 정도 걸리는 암스테르담 중심부로 이동했습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안.
“내가 유럽에 있구나.”
왼쪽부터 조가혜님, 네덜란드 대표 맥주 하이네켄
뜨거운 여름 햇빛 아래 야외에 앉아 조가혜님과 하이네켄 한 잔을 마셨습니다. 긴장이 풀리고 시원한 맥주가 들어가니 정신도 돌아왔습니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넘치는 아드레날린을 안주로 사후강평을 했습니다.
“다음에 하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질문에 이렇게 답했어야 했는데. 이 부분을 더 강조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할걸, 저렇게 할걸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막상 해보니 할만하네요. 또 해보고 싶어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
2탄 예고
스타트업 발표의 재앙 : 미비한 준비의 폐허
behind the scenes